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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들여다보기/관정도서관 서재

엔드 오브 타임 - 초끈이론을 더 이상 연구하지 않는 물리학자들

 이론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이 쓴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1999년 책으로, 초끈이론을 활용한 우주에 대한 설명을 거의 최초로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쓴 책이다.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는 "우주의 구조"를 읽고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내용이 거의 똑같다) 이번에는 신작 "엔드 오브 타임"까지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았다. 그러고서 개탄을 금치 못했다. "초끈이론은 정녕 끝났는가!"


 

 물리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내 고등학교 친구 역시 중학생 시절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고 물리학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초끈이론의 현재는 어떻니"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20년도 전에 쓰인 책이고, 그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만 따지자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을 이뤘기 때문에 초끈이론 역시 눈부신 발전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초끈이론 끝났어" 초끈이론에 반대되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어 패러다임 시프트가 이뤄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우주의 구조를 연구하는 분야가 소멸상태에 다다렀다는 이야기였다. 몇 십년이 넘게 초끈이론 관련된 증거라고는 힉스 입자밖에 없었던 것 같다(아닐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답보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제일 핫한 분야인 "딥 러닝"으로 물리학자들이 봇짐 싸들고 이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 이상 별과 우주를 관측하고 계산하는 로망만으로는 물리학자의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자의 강점이 "빠르고 정확한 계산" 밖에 없다면야 딥러닝으로의 이주도 환영할만한 이야기겠지만,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강점으로 가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엔드 오브 타임을 읽으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20년 전에 쓰였던 엘러건트 유니버스에서 추가되는 과학적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중간 중간 인문학의 면모를 띠고 있을 정도였다. 책의 주제 자체가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인 만큼 단순히 초끈이론으로 우주를 설명하겠다는 내용만 담고 있지는 않겠거니 싶었지만, "종교의 기원"이라든지 "진화의 방향" 같은 인류학자 같은 내용들 - 명확한 근거를 담는다기 보다는 정황적인 예시들을 드는 것으로 내용을 채우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뇌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면서 "영화 프레임들 사이에 팝콘을 먹어라(eat popcorn) 라는 프레임을 끼워넣었더니, 너무 빠른 프레임속도 탓에 글자를 인식한 사람은 없었지만 팝콘 매출이 크게 늘었다" 라는 내용을 어물쩡 끼워넣은 것이다. 해당 실험은 마케팅 전문가 제임스 비커리가 1957년 수행한 실험이었는데, 문제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실험이 재현된 적도 한 번도 없었고, 해당 내용은 통째로 사기라고 할 수 있다.

 

 주석에서는 또 어물쩡 "해당 내용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본문에서 그런 내용을 끼워넣었다는 사실이 문제다. 이 사람을 정말 학자로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의심해야 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멋진 사람이지만, "어렵디 어려운 과학적 사실을 대중을 위해 풀어주는 사람"의 역할로서는 자격 미달이다. 


책 내용이 온전히 의미없는 것만은 아니다. 중간 중간 엘러건트 유니버스에서 담지 못했던 (혹은 나왔음에도 내가 잊어버린) 우주에 대한 멋진 인사이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엘러건트 유니버스 만큼의 새로운 사실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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