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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들여다보기/관정도서관 서재

"단편소설은 뭐하러 읽어요?" -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어렸을 때는 단편소설을 정말 싫어했다. 단순히 재미없어 한 것이 아니라, 싫어한 것이다. 아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소설집 "나무"를 읽은 뒤부터가 아닐까 싶다. 그 전에는 "개미"며,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등등 재밌게만 읽다가, "나무"는 정말 형편없게만 느껴진 것이다. 짧은 글들이 서로 개연성 없이 놓여있는 와중에, 각 작품의 이야기 구성 역시 이렇다할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단편소설은 장편소설보다 완성도가 떨어진다' 혹은 '단편소설은 습작 정도에 불과하다' 하는 편견을 지니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모든 소설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어야 온전히 그 메시지를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정교하게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각 상황에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끔 해야 하고, 종내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컨대 영화 인셉션 같은 것이다. 

 

 인셉션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꿈을 자꾸 자꾸 겹쳐놓았듯이, 보다 확실한 메시지 전달을 위해서는 장편소설이 단편소설보다 적절하다. 어쩌면, 단편소설에서는 메시지 전달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편소설의 역할은, 어떤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대한 공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거 공감해서 뭐할건데요?" 하고 묻는 매정한 사람도 있겠지만,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결국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단편소설 - 렉싱턴의 유령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내가 위에서 정의한 "소설을 읽는 이유"와 정반대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하루키 소설의 장르라고 하면 "Magical Realism" 즉 마술적 사실주의이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 중간 중간에 판타지적인 요소들을 집어넣는다거나, 판타지 소설에 나올법한 일들을 바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포장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메시지도 담겨있지 않을 수도 있는가하면 전혀 공감되지 않는 상황들도 많다. 사실 공감을 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난쟁이나 녹색 괴물들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에 공감하고 있자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둘 다 하루키 소설에 나온다). 

 

 하지만 - 하루키의 모든 단편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 판타지적인 표현으로도 정말 기가 막히게 내 일상을 그려내는 단편소설도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비유의 원리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해당 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것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이별을 앞둔 사람의 마음을 "앞으로 닥쳐올 상황에 대한 걱정이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게 한다"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을 찧고서 아직 통증이 몰려오기 직전 같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와닿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번에 읽은 단편 "렉싱턴의 유령"에서는 수록작 "침묵"과 "일곱 번째 남자"가 특히 와닿는 내용들이었다. 따돌림을 받는 고등학생이 내적으로 단단해져 가는 과정, 그리고 스스로 용서 받지 못할 과거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과거를 마주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쓸 수도 있지만, 장담하건대 단편소설을 통해 해당 상황을 깊이 공감한다면 훨씬 재밌을 것이다.


 처음으로 하루키 책을 읽은 것은 1Q84 였다. 장편 소설이었고, 손가락 하나 길이만한 두께로 총 세권이었으니 양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마술적 사실주의로 점철된 표현들은 내가 전혀 공감할 수 없었고 (난쟁이가 이 소설에서 나온다) 결국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뭐였는지 아직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 이후로 하루키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처음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이었다. 내가 인정해준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때부터 다시금 하루키 책을 읽게 되었고 그 이후로 읽게된 "댄스 댄스 댄스"는 총 일곱 번 정도는 읽은 것 같다. 

소용돌이에서 정신 못차리는 나

 이렇게 좋아라 읽다보니,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전에도 "하루키식 글쓰기연습" 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일기를 쓰던 적이 있었다(관련 글). 어제 역시 그런 생각을 하며 태블릿으로 열심히 글을 적고는 위와 같은 일러스트도 그려넣었다. 차곡 차곡 쌓이다 보면,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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