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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들여다보기/뇌 속 풍경

알파고 다큐멘터리 (Alphago - The Movie) 후기: 알파고 버그가 만든 스노우볼

https://youtu.be/WXuK6gekU1Y?si=rNzMOdDZM_UxeP_Z

 

바둑을 배운 지 3개월 쯤 된 것 같다. 사실 배웠다기보다는 그냥 플레이한 지라고 해야 할까? 그냥 앱을 통해 9줄 바둑부터 둬보는 중이니까. 당연히 목표는 언젠가 18줄 바둑을 둬보는 것이지만, 언제쯤 가능할 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만큼 복잡한 게임이다. 

 

하지만 일반 바둑 경기를 보는 것은 꽤나 재밌다. 해설진들의 리액션이 맛깔나기도 하고 ("소름이 돋습니다-!") AI가 예측하는 형세가 창 한켠에 보기 좋게 그려져있기 때문에, "아 흑이 이기고 있군" 혹은 "아 방금 수로 30집이 뒤집혔군" 같은 말을 쉽게 지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나니 새삼 이런 AI 기반 형세 예측이 적용된 것이 채 10년이 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 확신조차되지 않고, 방금 둔 수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일반인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바둑을 재밌게 둘 수 있었을까? 뭘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기만도 한참이 걸렸을 것 같은데...

 

다큐멘터리는 개발사 딥마인드에서 처음으로 인간 프로를 초청하여 게임을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럽 챔피언인 판 후이라는 기사를 초청해 5:0으로 이기면서 알파고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판 후이는 2단밖에 되지 않으니 (좀 엄격한 잣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딥마인드 사람들도 긴가민가 했을 테다. "뭐 이기긴 했는데... 잘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건가?" 하듯이.

심판진 가운데에 판 후이 2단, 이세돌 앞에 앉은 아자 황 엔지니어

 

그래서 한국기원과 협력하여 이세돌과의 매치가 성사된 것이다. 이세돌이 계속해서 "아 5대 0 아니면 4대 1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든지, "좀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같은 말들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와서야 "와, 뭐 저렇게 오만하게 말했지" 싶지만, 그 때는 그럴만 했다. 이세돌에게 주어진 것은 판 후이와 알파고의 기보 뿐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당 대국은 고작 2개월 전이었다. "이런 애랑 대국해야 하는거야?" 같은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전성기 시절에 둬야 하는 대국도 많은데, 아직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기계랑도 게임을 해야 한다?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기원이라는 곳이 선수 보호는 안해주고 이런 것까지 시키는구나,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딥마인드 개발자들은 조용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세돌의 패배가 누구보다도 뻔하게 느껴졌던 유일한 인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좀 더 악당같은 느낌이 들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겁에 질려있었다. 미팅 자리에서는 "우리 기세 좋게 이런 대국까지 만들었는데, 진짜 제대로 안하면 개망신이야", "회사 망할지도 몰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딥마인드의 수석 개발자 아자 황은 (나중에 이세돌 앞에서 알파고의 대리대국을 해줬던 사람이다!) 그런 말을 듣고도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라고 멋쩍게 웃었더랬다.

 

어쩌면 이세돌이 시작 불리했던 게임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라도), 이지만 질 것 같지 않다고 자신했던 대국은 이세돌의 3연패로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게임 한 판 한 판이 참 손에 땀을 쥐는 연출로 구현되어 있다. 대국의 실제 내용까지 잘 나와있지 않지만, 이세돌의 고뇌가 주변 해설진들의 자료화면 ("소름이 돋습니다-!")으로 잘 전해진다. 이세돌이 유일하게 이겼던 4국은 "사실 인간의 처참한 패배를 우려한 개발자들이 일부러 졌다" 같은 루머가 퍼졌던 적도 있지만, 뒤에서 살펴본 개발자들의 리액션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승률을 확인하는 기술을 가진 유일한 인류였던 딥마인드 개발자들이 "승률이 8% 떨어지는 건 처음 봤네요" 같은 말들을 하고 있던 것이다.

판 후이는 "사실 알파고에는 치명적인 버그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확히 어떤 버그인지는 모르겠지만, 허사비스를 포함한 개발진들은 "결국 개선하지 못하고 이세돌과의 대국에 참여하는게 너무 불안합니다" 라고 까지 말했더랬다. 나중에 유추하기로는 이세돌의 4국처럼 중앙을 침투하는 경우 알고리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라는 것 같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다. 알파고라는 알고리즘은 이후에도 발전과 개선을 거듭하여, 이제는 더 이상 바둑 알고리즘을 만들지도 않는 실정이다. 당연히 그런 버그도 없어졌을 것이다. 물론 이세돌이 그런 오류를 발견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AI의 발전이 10년 정도는 늦춰졌겠지?

 

나로서는 휴대폰을 고등학교 입학에 맞춰 구입했고 (2010년), 스마트폰은 대학 입학에 맞춰 구입했다 (2013년). AI는 알파고가 있던 2016년에야 처음 접했고, ChatGPT는 학교 과제를 그럴듯하게 해결해준다고 하던 2022년에 접했다. 늘 생각하는건, 내가 스마트폰이 있던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면 서울대는 꿈도 못꿨겠다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AI가 없던 시대에는 어떤 방법으로 바둑을 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젠가 생각해보기로는, 미래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초끈이론은 어떻게 될까? 양자 컴퓨터는? 양자중력이론은? 그런데 반대로, AI나 스마트폰 같은 시대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특권과도 같다. 그러니까 기술의 발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온전히 즐기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겠구나 싶다. 나로서도 사실은 스티브 잡스의 생애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제대로 본적도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