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분노로 가득차서 뜨거웠던 머릿속이 차가워진 뒤, 내일은 기필코 혼자 자유여행을 하리라 다짐했더랬다. 아침에 엄마와 함께 나가 길거리에서 단빙을 먹고, 용산사를 구경하고서 다시 호텔로 돌아온 뒤에 기회를 틈타 "전 박물관 쪽으로 가 있을게요!" 하고는 호텔에서 뛰쳐나왔다.
오늘의 일정인 대막고궁박물원으로 가기 직전에 있는 스린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는 망고 빙수 카페로 가서 스무디 한잔을 시켜 죽치고 있었다. 그림도 그리고, 서점도 들러 이것 저것 구경도 하고. 그 이후에는 고궁박물원으로 이동하려고 형에게 연락했더니 내일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내일은 박물관 쉰다." "그럼 내일 모레 가지 뭐" "그래 뭐 알아서 해라!" 오디오 가이드 하나가 딸린 티켓 한 장과 일반 티켓 세 장을 구입해뒀건만, 뭐 만나서 링크를 전해주든지 해야겠다 싶었다.
고궁박물원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나, 학교 행사를 통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이번 경험은 상당히 재미없었다 (냉정하지만). 중국의 역사가 깊고, 그 와중에 이런 저런 예술품이 많은 것은 알겠는데, 너무 맥락이 없이 전시품들이 진열된 느낌이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고 이에 따른 유적에도 흥미가 있지만, “이거 봐바! 잘 만들었지?” 하는 식의 전시는 별로였다. 상아를 가지고 잘게 조각하여 세밀한 형상을 만들어낸 것? 그래 잘했다. 동파육 모양 돌 조각? 퉤! 이런 식으로 관람하다 보니 전시를 훅훅 지나가고 말았다. 그렇다고 대만 여행을 오는 사람에게 “고궁 박물원은 가지 마세요!” 라고 말할 것이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닌 것이, 어디 가서 이런 느낌을 받아보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니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물관으로 오고 있다네? 음 그래 알겠다. 근데 웬걸, 표를 모바일로 구매해서는 카톡방에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사둔 표를 부들부들 하면서 환불 링크를 찾았고, 다행히 환불 가능한 표이기에 바로 환불해버렸다. 차가워졌던 머리가 또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으니,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근처에 있던 딘타이펑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으나 대기 70분이 적힌 표가 아버지 체력의 남은 피 1에 막타를 가한 것이다. 아버지의 GG 선언에 또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우버이츠로 배달을 시켜먹기로 하고 치킨과 우육탕면을 주문했다. 혼자서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던 그 순간까지도 머릿속은 분노로 가득하여 부들부들. 그래 오전에 혼자여서 심심했지? 여행은 이런 맛이란다. 밥을 다 먹고는 호텔 근처 아시장으로 혼자 떠났다. 뱀 탕을 판다면서 살아있는 비단뱀을 전시해 둔 골목, 매춘을 하려는 듯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말을 거는 여성들을 (엄청나게 평범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매춘이 아니라면 굉장히 실례될 정도로) 지나다 보니, 1960~1980년대 아시아의 용으로 불렸던 대만이 맞나 싶었지만, 서울의 신림이라고 별 다를 바는 없을테니 그러려니 여기게 되었다.
5일 일정 중에서는 가장 기억이 희미한 일자이다. 거봐, 혼자 다니면 심심하잖아. 분노로 바들바들 대는 순간이라도 기억에 남는 것이 낫지.
'사생활 들여다보기 > 뇌 속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의 대만 여행기] “진작 딘타이펑 올걸” 4/5 (0) | 2024.06.19 |
---|---|
[6월의 대만 여행기] “제레미 린이 누군데?” 3/5 (1) | 2024.06.19 |
[6월의 대만 여행기] "가족여행에서 다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사실 편견 아닐까?" 1/5 (1) | 2024.06.19 |
초보자용 철인3종에서 한강물 건너다 죽을 뻔한 사연 (한강 쉬엄쉬엄축제) (1) | 2024.06.01 |
"다크나이트에서 그...!" '악마와의 토크쇼' 추천하는 이유 세 가지 (0) | 2024.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