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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들여다보기/뇌 속 풍경

[6월의 대만 여행기] “갑자기 분노를 싸지르다” 5/5

드디어 마지막 날. 대만 여행 2일차 저녁이었던가 “한 3주 있던 것 같다” 라고 소리내어 말했는데, 마지막 날이 되니 아쉽다. 어제도 오후 10시가 되기 전에 잠들었기에 오전 6시에 깨서는 조깅을 하러 나갔다. 어디로 갈까, 전망이 좋다는 샹샨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까, 어제 돌았던 중정기념관이나 다시 돌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3일차 저녁에 돌았던 시먼딩 야시장을 돌기로 했다. 오후 5시부터 오전 12시까지만 운영하는 야시장 거리는 아침이 되면 통행로로 바뀐다. 아침에 가봤더니 명동의 한낮처럼 지저분했다. 그래도 “여기가 예전에는 발디딜 틈도 없는 야시장이었대” 하며 구경하는, 타임머신 마지막 장면같은 매력이 있었다.

 

시먼딩 앞 홍루

 

무엇보다도 오늘 아침 날씨가 기가 막혔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햇살과 파란 하늘! 대만 오기 전에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더랬다. 조깅을 하는 둥 마는 둥 횡단보도 마다 멈춰서며 거리를 돌아봤다. 그러다 허기를 느끼고 아침을 파는 가게로 들어가서는 둘째 날 아침과 같은 단빙을 시켜먹었다. 내 생각에 관광용 중국어는 “뚜에이 지엔!” (추천) 만한 게 없는 듯하다. 좀 더 정중히 말하려면 “뛔이 찌엔 이샤!” (추천해주세요) 가 적절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외국인이다” 하는 느낌을 주려면 “뛔이 찌엔!” 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주인 아주머니가 이것 저것 가리킨다. 첫 번째로 가리키는 것을 고르면 된다. 녹차의 경우 한자를 읽고 사진을 찍어 (3배 줌) 이거 달라고 손짓으로 말했다. 

 

 

단빙은 35원, 한국 돈으로 1500원 정도 할텐데, 딱 그 정도 맛이다. 1500원 어치의 맛이 격 떨어진다는 게 아니라, 만족감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삼각김밥 하나 사먹는 느낌보다 좀 더 맛있다. 삼각김밥이 300원 정도 한다면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인데 호텔에서 쉴까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마지막 일정을 세워 홀로 밖으로 향했다. 샹샨 전망대를 안 보고가면 두고 두고 생각나겠다 싶었던 것이다. 지도에 샹샨을 검색했을 때 5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나오길래, 지하철 역까지 50분이면 너무 멀다, 하는 마음으로 고심하다가 결국 나선 길이었는데 알고보니 전망대까지 50분 걸리는 경로였다. 샹샨역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샹샨 공원을 지나는 길에 허스키 한 마리를 마주쳤다. 쓰다듬어도 되나요 라는 말은 “니하오, 커이 마?” (안녕하세요, 가능할까요?) 로 대체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극락을 보고 왔다. 그러고 샹샨 전망대까지는 10분 남짓할 정도로 가까웠다. 올라서고 나니, 안왔다면 상당히 후회했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다. 날씨가 좋았고, 전망이 좋았다. 땀을 비오듯 흘리니 기분도 좋았다. 

 

 

내려오는 길에는 샹샨 공원에서 농구하는 아저씨들 틈바구니에서 3대3을 했다. 얼쩡얼쩡 대고 있으니 들어와서 하라길래 냉큼 들어갔다. 김선형식 농구를 전수해줬고, 공식 기록 슈팅 1/5, 어시스트 2, 턴오버 1, 파울 1을 기록했다. 쫓겨나기 직전에 황급히 “셰셰”를 외치며 돌아왔다. 

 

쿠라스시

 

어제 저녁 비싼 딘타이펑을 먹으며 아빠가 만족스러워 했기에 오늘 점심도 로컬 식당 보다는 비싼 곳으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회전초밥집을 갔다. 이거야말로 여기가 한국이여 일본이여 알고보니 대만인 최악의 선택지, 나로서는 절대 가지 않을 식당이었지만, 막상 먹고 보니 맛있었다. 가격도 저렴해서 네 명이 배부르게 초밥을 먹고 마무리로 라멘과 우동을 하나씩 야무지게 먹었음에도 6만원이 약간 넘었을까, 인당 15000원 정도가 나왔다. 굳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고 성낼 필요가 없구나,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때가 많구나, 느꼈다. 이런 맛에 여행하지. 

 

근데 초밥을 시키는 와중에 배고파 죽겠는데 누르라는 초밥 주문 버튼은 안누르고 이것 저것 메뉴를 고르다가 참다못한 내가 성게알 초밥을 고르자 “나 성게 싫어하는데?” 라고 말한 형의 뇌 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모르겠다. 생각의 깊이가 지구와 같다면 형은 잔디만 깎고 있는게 아닐까? 형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냉큼 자리를 바꿔 앉고 내가 주문 모니터를 차지한 후에야 직성이 풀렸다. 아 상쾌하다. 역시 내 뜻대로 해야해.

 

 

체크아웃 이후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도 난관이 겹쳤다. 초밥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를 타러 나갔다가, 택시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1차 분노를, 초밥을 주문하며 겪은 형의 생각깊이 이슈로 인해 2차 분노를, 버블티 주문 후 수령까지 15분 걸리는 타이베이 매장의 행태에 3차 분노를, 버블티 맛에 푸념을 하는 아빠에 4차 분노를, 공항철도를 마친 뒤에 엄마를 와이파이도 없이 사라지게 한 화장실 이슈에 5차 분노를, 전날 산 술로 인해 캐리어 수하물을 추가주문했다가 체크인 공간에서 항공사 카운터로 소환당한 형에게 6차 분노를 겪으며 뇌가 산화했다. 산화하고 나니, 내 분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특정인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분노하고 있음이 명백했다. 반대로 말하면, 해당 인원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나를 분노케 했음이 명확했지만, 어쨌든 내 분노는 티가 나기에 해당인으로서는 “또 지랄이네” 싶었을 테다. 끊임없이 분노하는 막내를 잠자코 받아준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바이지만, 트립닷컴에서 받은 라운지 이용권으로 식사를 퍼먹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라운지는 다음에도 이용해야지…

 

 

이렇게 대만 여행을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해외여행이라 그런지 느낀 점이 상당했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느끼는 분노와 그로 인해 피해보는 일행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케하는 가족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미우면서도 고맙다. 다음 가족여행은 아무래도 가기 힘들겠지만, 마지막 여행으로서 좋았다. 6월에 대만여행을 가는 것조차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좋은 날씨에 돌아다닐 있었던 것도 좋았고, 중간 중간 푸념을 들어준 여자친구에게도 고맙다. 여튼 무사히 돌아왔으니 ~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