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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들여다보기/뇌 속 풍경

대학원생이 스타트업 관련하여 귀동냥을 다니는 후기 1) VC 출신 선배

석사 졸업이 한 학기 남았다. 하반기 취업을 준비한다면 바로 9월부터 시작인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취업시장에 나를 내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스타트업의 문을 좀 더 열어두고 싶다. 대학원 창업 팀에서도 열심히 하지 않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변했는가, 하면 나도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한다. 현실로 닥친 진로 설정에 눈을 떴다고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지난 주말, 과거에 벤처캐피탈에서 만난 적이 있던 (관련 글) 심사역에게 무작정 연락을 드렸다. 지난 글을 읽어보니 역시 글로 정리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이런 이야기를 했었더랬지 하고 바로 떠오른다. 글 말미에는 "명함을 챙겨왔으니 다음에 궁금한 게 생기면 연락해도 되겠지?" 라고 적어놨는데, 진짜로 연락하게 될 줄은 나도 모르고 그 사람도 몰랐을 것이다.

 

 월요일이 되어 통화를 걸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심사역은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한 뒤였다. 이거 어쩌지, 하다가 이왕 연락한 김에 만나나 보자는 생각으로 수요일 약속을 잡았다. 아 분당에 계신다구요?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편도 한 시간 반에 달하는 제우의 기묘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분당에 가는 길은 꽤 멀었지만 또 의외로 쾌적했다. 버스전용차선이 잘 되어 있던 까닭이다. 여행가는 기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전 심사역 분이 새로 옮긴 회사는 꽤나 회사원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입구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흡연가 무리는 도대체 뭐하는 곳인가 싶게 만들 정도였다. 나중에 나오면서 보니 내가 들어간 곳은 후문이었지만, 후문이든 정문이든 입구는 입구다. 여튼 도착하여 1층 카페에서 만나면 되려나~ 싶었는데 본인이 근무 중인 층에서 만나자고 하여 놀랐다. 분위기가 꽤 자유로운 회사인 것이다. 


 회사 내 휴게 공간에서 전 심사역 분을 마주하고, 일단 나도 모르게 피칭을 시작했다. 어떻게 창업 준비를 했었는지, 현재 상태는 어떤지, 창업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같은 말들. 상당히 담백하게 말하는 느낌이었다고 생각이 되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다. "설명이 너무 형편 없는데" 혹은 "전혀 열정 같은게 느껴지지 않아" 하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이게 나의 발표 스타일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발표를 할 수 있는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요모 조모 생각해보시던 전 심사역 분은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셨다. "바로 창업하는 것은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본인 역시 두 차례의 창업을 경험하시고, 계속해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만 이력을 쌓아왔던 사람이 아닌가. 나로서는 실질적인 조언들, 예를 들면 "투자를 받으려고 할 때, 지분 구조는 이러 이러한 것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라든가 "대표를 할 때 인건비는 저러 저러한 방식을 통해 챙기시면 됩니다" 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더 실질적인 조언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야기를 차근 차근 듣다보니 왜 그렇게 극구 만류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스타트업은 상당히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그것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쉽게 말하면 "박사를 통해 교수, 정출연 등 안정된 장소에서 기술 개발과 검증을 마친 이후에 창업을 하는 게 낫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안정된 장소에 있어야 팀 구성이 훨씬 수월해지고, "저 팀은 망할 일은 없겠다" 같은 평가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처럼) 석사를 하고 맨땅에 헤딩하듯 창업을 하게 된다면, 리스크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스타트업의 리스크에 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다. 본인이 "심사역으로 있으면서 구성했던 포트폴리오 중에서 성공한 케이스는 3%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도 선별할 대로 선별했음에도 그 정도의 수치가 되는 것이다." 본인이 "알고 있는 가장 똑똑한 사람 역시 현재 사업을 정리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다."

 

 특히 "창업이 주는 효과에 (내게 있어서는 몰입해서 일할 수 있는 경험) 매혹되어  그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라는 말이 와닿았다. 나야 직장 생각을 하면 답답한 마음에 스타트업을 꿈꾸고 있지만, 과연 그 위험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았는가?


 한 시간여의 면담을 (생각보다 길게 이야기했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꽤 마음이 복잡했다. 면담을 통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한 보따리 안고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먼 훗날 이런 고민들이 (이렇게 적힌 글을 통해서) 내게 큰 자양분이 될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냥 저냥 살 수 있다면 그냥 저냥 살겠지만, 제대로 살아보려니 이렇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