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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 들여다보기/뇌 속 풍경

넷플릭스 - 에놀라 홈즈: "네 마음만 있니?"

 어린 시절 말싸움할 때 단골 멘트는 "내 마음이다!" 와 "니 마음만 있냐! 내 마음도 있다!" 였다. 지역별 차이를 뛰어넘는 문화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 어린 시절 인지능력 발달이 모두 비슷비슷한 수준에서 이뤄지는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셜록홈즈의 여동생이라는, 가공의 인물의 가공의 인물을 활용한 영화다. 추리/미스터리 장르에 속해있지만, 영화 내내 중학생 수준을 위한 페미니즘 교육 영화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되다 만듯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오마주와 엉성한 플롯은 둘째 치고, 모든 인류의 평등을 지향하는 가치에서 나온 생각인지 드문드문 나오는 중세 영국 동양인과 흑인 등장인물들은 도대체 영화의 배경이 언제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해외 영화계에서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 백인 위주로 작품이 형성되는 것)' 이라는 말이 있듯이 '블랙 워싱' 역시 존재한다고 한다. 다양성 추구를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흑인을 등장인물로 캐스팅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트 워싱이 있으니, 반대로 블랙워싱도 있어야 하는 것 아냐?" 하고 말한다면 할 말 없다. 흑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간 영화계에서 받아왔던 차별을 생각하면 이렇게 강제적으로, 무조건적으로라도 흑인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 도움이 될 테다.

 

07년 고1 3월 모의고사 탐구영역 

 하지만 이런 상황을 볼 때마다 늑대 우화가 떠오른다. 음식을 모두 공평하게 나누자는 늑대의 의견에, "그럼 네가 어제 잡은 먹이부터 나누자" 라고 지나가던 나귀(아마 늑대밥이 되었을 테다)가 말하자 냉큼 의견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 같은 문제도 이와 동일하다. 인간이 존엄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존중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럼 나부터 존중해줘" "아니 나부터야" 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그럼 모두가 공평하게 존엄해지자" 라고 사회적으로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이나 흑인 인권문제가 "인류는 평등하다"를 주장하는 한,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성별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요새 미국 사회에 만연한 Asian Hates를 보면, "(백인과 더불어) 흑인 인권만 소중하다" 라고 말해왔던 것은 아닌지 헷갈리게 된다. 예전에 한 페미니스트가 "여성 인권은 소중하다. 성소수자의 인권은 관심없다"라는 투로 말했다가 트렌스젠더와의 갈등이 불거졌던 일 역시 허탈할 따름이었다. 내 지인은 "줄다리기에서 남성이 한쪽 끝으로 굉장히 많이 당겨놓은 상황이니, 여성이 아무리 세게 잡아당겨도 남성은 뭐라 말할 권리가 없다" 라고 주장하고 다니기도 했더랬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순간, 이는 더 이상 인권문제가 아니라 이익집단의 문제가 된다. 폐기물처리장이 내 집 앞마당에 들어오느냐 마느냐와 같은 수준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사회적 합의 위에서 논의를 진행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익집단의 문제로 인권을 다루게 되면, 여성단체가 "여성 인권을 존중하라" 라고 말하는 것으 남성집단에게 설득력을 잃게 되고,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 라는 말도 백인들에게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렇게 인권 문제에 대해 주절 주절 써내려갔던 근본적인 이유는, 에놀라 홈즈의 스토리가 너무 엉성했기 때문이다. 좀만 잘 짜여진 각본으로 영화를 찍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딴 소리로 영화평을 남기진 않았을 텐데... 관람객으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으니, 어쨌든 영화의 존재이유를 달성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