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조하고 있는, 어깨 재활 기기 제작 프로젝트의 담당자인 선배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똑똑한"이라는 형용사는, 사람들마다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다르다. 단순히 수능 점수가 높은 사람도 일반적으로는 똑똑하다고 하기도 하고, 상식이 좀 많은 사람도 똑똑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 선배는 뭔가 다르다. 새로운 사실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부족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추가적인 질문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남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함께 어떤 회의에 들어서거나, 발표 같은 것을 들어보면 "오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하게 된다. 나도 앞으로 열심히 연구하다보면 저렇게 될 수 있겠지- 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내가 두 차례에 걸쳐서 글로 써왔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법" 혹은 "생각의 모래성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는 이 정도로 해두자(사실 부족하다). 이 선배 덕분에 놓칠 뻔 했던 지식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견갑상완리듬"이라고 부르는 Scapulohumeral Rhythm 이론 역시 그 중 하나이다. 리듬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뭔가 경쾌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사실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체공학 이론이다.
내용은 의외로 또 간단하다. 어깨의 움직임은 어깨관절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견갑골이 함께 움직임으로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 비율은 1:2 정도를 이루어서, 어깨가 120도를 움직인다면 견갑골이 60도 정도 움직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을 알기 전에는 어깨 재활치료의 경우 견갑골의 움직임을 잘 제어해주면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정도를 어깨 CPM 보조 기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의대 교수님께 전달받은 상태였다. '아 그렇구나, 견갑골을 잘 눌러주면서 재활을 해야하는구나' 고개를 끄덕거릴 즈음, 선배가 물어봤다. "제가 알기로는 어깨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견갑골이 사용된다면, 견갑골을 눌러줄 경우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요?"
그제서야 교수님도 다시 한 번 내용을 정리해서 말씀해주셨다. "아 물론, 정상적인 움직임에도 견갑골은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일정한 비율이 있어요. 어깨 통증이 심한 경우에는 그 비율이 깨지게 되는거죠. 온전히 견갑골만으로도 팔을 들어올리는 모션이 가능하기 때문에, 통증을 피해서 그런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렇게 알게된 내용이 견갑상완리듬 이론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아 어깨가 아프니까 견갑골로 팔을 들어올리며 살아야겠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선배같은 사람들은 "어깨가 아파서 견갑골을 들어올리게 되는데, 견갑골을 어느 정도 들어올릴 때 팔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파헤칠 것이다. 그런 연구의 일환에서 1:2라는 비율이 탄생하고, "그럼 이 정도 비율을 유지하게끔 재활 운동을 시켜주면 회복이 빨리 되겠군" 하는 식의 단계적 사고도 가능해진다.
선배가 이런 사고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배경지식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어깨 움직임에 견갑골이 사용된다- 라는 배경지식은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이다. 선배는 예전에도 어깨 관련 재활 프로젝트를 한 번 진행해본 적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나로서는 실제 어깨를 움직이면서도 눈치채지 못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단순히 배경지식이 많다는 이유로 이런 단계적 사고를 밟을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다. 기존에 있던 지식과 새로 들어오는 지식의 상관관계를 뚜렷이 하고, 모순되는 내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모순되는 내용이라는 것이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 vs 모든 것을 뚫는 창" 같은 명확한 구분이라면 편하겠지만, "그냥 창 vs 그냥 방패" 정도의 상관관계에서도 "그렇담 붙으면 누가 이길까" 하는 질문을 바로바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나였다면 "창과 방패가 있구나" 하는 수준에서 그칠 테다.
내 생각의 모래성은 언제쯤 무너지는지 모르겠다. 한 번 지을 때 너무 튼튼하게 짓는 것은 아닌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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