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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카를로 로벨리 - 나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양자역학과 마르크스주의” 뜬금없는 조합이다. “아이폰16과 김치싸대기” 정도의 조합이라면 그나마 친숙하기라도 하지, 도대체 양자역학과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이유로 한 데 묶였을까? 게다가, 양자는 어떤 역학을 갖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주의란 또 무엇인가?

 

 

이 책은 물리학을 빙자한 철학책이다. 둘이 엮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사실 1900년대 물리학자들은 철학자의 역할도 겸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옛날 데카르트도 단순히 “생각한다고로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격자 좌표계를 만들기도 했더랬다. ‘물리’란 말이 의미하듯, 사물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에서 ‘마음’의 기원을 연구하는 철학에 관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하지만, 책이 너무 어렵다. 일반 철학도 사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부터 설명하고 있으니 어려운게 당연하다. 다행히, 책에서는 양자역학을 심도깊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쉽게 설명해줘서 문제이다. 양자역학을 설명해주기 위해 온갖 쉬운 비유를 쓰지만, 정작 양자역학의 본질적인 특성은 설명하지 않는다. 물리학을 바라고 들어온 독자들은 실망할 수도 있지만,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극도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양자역학 공식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면 (나오긴 한다) 철학으로 넘어가는 시도는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다. 오히려 일상의 쉬운 비유들만 가지고 양자역학을 설명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다만 책을 읽기 전 배경지식이 있다면 좀 더 좋을 듯 하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물론, 즉 사회의 경제 발전은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사람의 의식이 물리적 현상들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생각은 1867년 자본론 속에 응축되어 있지만, 소련이 해당 내용을 받아들인 것은 1910년대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그는 Vl. Ilyin이라는 가명을 써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당시 동료이자 세력을 얻고 있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를 깎아내리기 위한 책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유물론의 반대격인 관념론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보그다노프의 관념론은 에른스트 마흐라고 하는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여기서 양자역학과의 연관성이 태어난다. 에른스트 마흐의 관념론은 “경험한 것에서만 안다고 말할 수 있다”를 기초로 한다. 물질적 세계나 외부현실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의 인식 자체가 세계를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뉴턴으로부터 시작된 고전역학, 절대적인 시공간 개념도 공격받는다. 절대적 공간이라는 것은 관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측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물체간의 상대적 움직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주르륵 흘러나왔다…라는 것은 마흐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셈이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은 그만큼이나 사고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는 레닌이 보그다노프를 숙청하고, 유물론을 앞세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소련 전체에 관철시켰지만 머지않아 공산주의 정권은 붕괴된다. 자본론에서 말했던 자본주의의 몰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해서 관념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자본론이 더 승기를 잡는 모습에 가깝다. 이 책의 제목인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봤을 때는, 너가 이 세상의 중심이다~ 이런 내용이나 지껄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관념론적 관점에서 절대적 시공간이 아닌, 서로 상대적인 가치만이 존재한다면 너 없이는 너의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돈도 경제도 아닌 나의 의식과 생각들. 나로서는 물리학도 철학도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 대한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